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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삽교 물줄기 따른 순례코스

원머리성지

 

  

 

 

예로부터 깊은 신앙의 뿌리로 자리 잡은 신앙 교우촌 원머리


원머리 성지는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평성당에서 북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과거 지명은 ‘언두리’이다. 이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에 둑을 쌓기 시작한 곳이라는 뜻에서 나온 ‘언두리’의 변형된 말로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 들어온 박해자들이 염전과 농사를 지으며 살던 신앙 교우촌이다.  그리고 병인박해(1866년)를 받을 때쯤에는 이미 이곳에 박씨, 양씨, 조씨, 문씨 등 많은 교우들이 살고 있었고 상당히 큰 교우촌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순교자 박 마르코(선진), 박마지아(태진)


마침내 이곳에도 박해의 광풍이 몰아쳐 1866년부터 1868년까지 3년여에 걸친 대박해로 많은 신앙 선조들이 잡혀 순교하게 되는데, 지금 원머리(한정리)에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두 분은 무진년(1868년) 수원 감옥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순교자 박 마르코의 아우 박 요셉은 1920년대에 형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마르코 형은 모친의 뜻을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모친과 함께 동네 교우들과 연락하고 지냈다. 신부님이 오시어 성사를 받으려 하면 부친이 금하는 고로 이를 마음속으로 꺼리더니 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어 잡혀 갈 때 그는 부모에게 하직하며 위로하되 거기 가서 죽으면 육정의 박절함이 없을까 만은 주 명대로 위주하여 죽는 것이 구령에 편한 일이라, 부디 염려마시고 훗날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한 다음 그 사촌 형 마티아와 함께 수원으로 붙잡혀 끌려갔다.

 모진 고문을 당할 때 사촌 형 마티아가 이를 못 이겨 배교하려 하자, ‘천주를 배반하고 영벌을 어떻게 받으려 하느냐?’고 깨우치니, 이에 마티아는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15일 후에 같이 순교하는데 구전에 따르면 이곳 출신 포졸이 죽은 시체를 찾아 이 곳 원머리에 안장하였다한다. 이 때 마르코의 나이는 33세였고 마티아의 나이는 52세였다. 그리고 이곳은 순교자 유해가 온전히 보존되어 모셔져 있는 성지로 전국에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이다.



두 분을 포함한 교우촌 원머리(언두리) 출신 순교자(20)들


병인년 대박해 때부터 잡혀 순교한 원머리(신평) 출신 열여덜분과 인근 출신 두 분의 순교자들의 기록인 병인정묘 치명일기와 치명사적은 이렇게 적고 있다. 

 병인년(1866)에는 원머리 출신 한마티아, 양정수, 홍베드로닐라, 양명상과 내포 인근 출신 최아우구스티노, 홍베드로 육인이 홍주(홍성)에서 순교, 치명하였고 정묘년(1867년)에는 홍주성 감옥에서 김마리아, 원씨, 양도미니코 삼인이 순교하였다. 

 무진년(1868)에는 해미에서 박요한, 문마리아 두 분이, 수원에서는 박 마르코, 박마지아 두 분이, 홍주에서는 최베드로, 김루치아, 김마리아, 원아나타시아 네 분이 그리고 순교년도 미상인 양아우구스티노도 이곳에서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