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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박해시기교우촌들

유구지역 교우촌들


성모성심의 발상지

공주 수리치골성지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점차 공주지역에는 로마의 카타콤바나 터키의 동굴교회처럼 비밀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우촌이 형성된다. 충청 천주교의 전래지인 내포지역이 평야지역인데 반해 공주는 산간지역이 많아 박해를 피해 신앙생활을 계속하려는 신자들이 숨어살기에 좋은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1839년 기해박해 이후,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그 후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당시 공주 지방에서는 국사봉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터, 진밭, 먹방이 등 여러 군데에 교우들의 은거지가 있었다. 그중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한 곳이었는데 이곳에 한 신입 교우가족이 오두막을 짓어 살고 있었다. 이곳은 한국 초기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조명을 받게 된다. 이 오두막에서 '성모성심회'가 창립되었기 때문이다. 제2대 조선교구장 성 엥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1838년 12월 1일에 조선교구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모시게 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하였고,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를 허락하여 1841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성 요셉과 함께 공동 주보로 정해주었다. 이에 감사하기 위하여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1846년 11월 2일 공주 수리치골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립하고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보호해 달라고 전구하게 되었다. 성모성심회가 창설된 수리치골의 외딴 곳 조그마한 오막살이는 이후 교우촌으로 점차 발전하였고, 신자들이 이곳에 모여 조선말로 기도문을 외우면서 성모마리아를 찬양하고, 죄인들의 회개를 빌게 되었으며, 인근지역 으로 천주교를 전파하는데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수리치골성지는 성모 성심 신심의 발상지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서 한국천주교의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다.